경주 12

경주 남산 부처골 2사지

부처골 입구 사지를 지나 玉龍魔이 있는 남쪽을 향해 가다보면 민가 뒤편으로 오솔길이 나있다이 길을 따라 약 500m 정도 오르면 보물 제198호인 감실 부처가 있다 이 감실 부처로 인해 오늘날 이 계곡을 부처골’혹은 불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불상이 있는 곳을 건물지 1이라 하며, 그 주변에서 확인된 축대 등을 포함해 건물지 2라 하였다.부처가 마치 위쪽에 숨어있듯,가던 오솔길도 보이지 않는 지짐에 오르면 곧 다시 나타난다해맞이마을에서 불곡으로 가는 오른편 능선 사이에는 평지가 있다. 이곳에서 신라시대 와편이 수습되어 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전부 밭으로 사용되고, 다른 유구나 유물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예전에 탑재가 있었다 한다. 사역의 전체적인 범위는 90 × 60m 정도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5.05.07

경주 안강 흥덕왕릉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金秀宗(경휘景徽)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 하였다.무덤의 주위 4모서리에는..

카테고리 없음 2025.05.05

경주 경덕사(景德祠)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塔洞)에 있는 신라개국원훈(新羅開國元勳)을 모신 사당. 배문(裵門)의 시조이자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인 배지타와 중시조인 고려개국원훈 태사 무열공(太師 武烈公) 배현경(裵玄慶)을 안치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1995년 새로 건립하였다.원래 명활산(明活山) 아래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있었으나, 문화재정리사업으로 198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후 다시 사묘(祠廟)로 개작하여 배지타를 중심위패로 모시고 배현경을 함께 배향하였다. 사당은 경내를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상단 중앙에는 사당인 경덕사(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를 배치하고, 내삼문인 경의문(敬義門)과 낮은 담으로 상하를 구분하였다. 하단에는 왼쪽에 재실인 한존재(閑存齋), 오른쪽에는 단칸의 유허비..

카테고리 없음 2025.05.04

경주 법흥왕릉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카테고리 없음 2025.04.27

경주 천군동 피막골사지

피막곡사지는 경주시 천군동 1573번지 일대로 후곡산의 남동쪽 구릉 하단부의 피막골에 위치한다.조사대상지역이 있는 피막골은 지형적으로 해발 200m 내외의 야산으로 사면이 둘러져있어 외부와의 교류가 드문 지역으로, 이러한 지명은 임진왜란 때 안동 권씨들이 난을 피해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피막’, ‘필막’으로 부르고 있다.현재 경주시 종합자원화단지 내로 진입하여 들어가면 웰빙센터 맞은 편 공터에 폐탑재와 기와편들이 있어, 이 일대가 사지일 가능성이 있다.본 사지는‘천군동사지’혹은‘천군동 피막곡사지 폐탑’으로 부른다.하지만 유적이 위치한 지형이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지형이기 때문에 사찰에 대한 자세한 연혁이나 사찰명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본 사지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오사카 긴타로가 조사하면서 사..

카테고리 없음 2025.04.26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나원리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고, 밑면에는 5단씩의 ..

카테고리 없음 2025.04.25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

월성 용명리사지삼층석탑(月城 龍明里址三層石塔)은 경주시가지에서 서북 쪽 약 15km 거리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은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856-7번지이다. 버스터미널에서 서쪽 영천방향으로 이어지는 4번 국로를 타고 서천교(西川橋)를 건너서 약 2km 지점에 충효동 서라별대학을 지나서 시가지를 벗어난다. 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약 5km 지점에 효현동 경주대학교가 있다. 경주대학교를 지나서 약 7km 지점에 이르면 우회도로와 접하는 광명동삼거리이고 약 200m 앞에 자동차전용도로와 일반도로가 분지된다.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약 5km가면 우측으로 대곡리 나가는 출구가 있다. 출구로 내려와서 바로 우측으로 고지교를 건너서 좁은 마을 앞길로 1km가량 가서 다시 작은 대곡교를 건너서 바로 죄측으로 하천 ..

카테고리 없음 2025.04.24

경주 내남 충의당&충의공원

경주 충의당& 충의공원​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에 있는 조선후기 무신 잠와 최진립 관련 주택. 시도민속문화재.1993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무신 잠와(潛窩)최진립(崔震立)의 생가로, 충의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다. 우측으로 난 대문채를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있으며, 정면 좌측에는 충의당과 경모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충의당 뒤로는 흠흠당·고방채·정침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각각 자리잡아 전체적으로는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충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좌측 2칸은 전면에 퇴칸을 둔 온돌방으로 꾸미고, 우측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다.가구는 3량가의 간결한 구조인데 대청 상부의 대량(大樑) 위에는 원형판대공(圓形板臺工)을 세웠다. 정침은 정면..

카테고리 없음 2025.04.08

경주 효소왕릉(孝召王陵)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제32대 효소왕의 능으로 크기는 지름 10.3m, 높이 4.3m, 둘레 57.5m이다.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이며 묘제는굴식돌방무덤이다.밑둘레에는 40∼50㎝의 자연석을 사용하여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둘레돌을 1m정도 쌓아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둘레돌이 대부분 묻혀 있고 아무런 표식물이 없다. 능묘 제도의 발달 과정으로 보아 선대인 신문왕릉보다는 발달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왕릉은 매우 초기적인 형식이다. 재위 시기는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번영으로 향하던 때여서 비록 특기할 만한 치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능이 빈약하다. 망덕사 동쪽에서 효소왕의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의 위치로 보아 효소왕릉 임은 분명하다. 왕릉은 1929년 4월, 1969년 11..

카테고리 없음 2025.04.02

경주 효공왕릉

신라 제52대 효공왕(재위 897∼912)의 무덤이다.​높이 5m, 지름 21.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부분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돌이 몇 개 남아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912년 왕이 죽자 이름을 효공이라 하고, 사자사라는 절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왕이 죽자 사자사 북쪽에 화장해 그 유골을 구지제의 동산 옆에 묻었다 하여 『삼국사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현재 이 무덤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사자사의 터로 추정하고 있다.​

카테고리 없음 2025.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