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막곡사지는 경주시 천군동 1573번지 일대로 후곡산의 남동쪽 구릉 하단부의 피막골에 위치한다.
조사대상지역이 있는 피막골은 지형적으로 해발 200m 내외의 야산으로 사면이 둘러져있어 외부와의 교류가 드문 지역으로, 이러한 지명은 임진왜란 때 안동 권씨들이 난을 피해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피막’, ‘필막’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경주시 종합자원화단지 내로 진입하여 들어가면 웰빙센터 맞은 편 공터에 폐탑재와 기와편들이 있어, 이 일대가 사지일 가능성이 있다.
본 사지는‘천군동사지’혹은‘천군동 피막곡사지 폐탑’으로 부른다.
하지만 유적이 위치한 지형이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지형이기 때문에 사찰에 대한 자세한 연혁이나 사찰명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본 사지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오사카 긴타로가 조사하면서 사천왕상이 세겨진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1970년대 이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됨에 따라 탑재와 사지를 보고하였고, 1993년 경주시 광역쓰레기장 매립장 부지로 선정되면서 이 일대에 대한 시·발굴조사를 하였으나, 본 사지는 발굴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2010년에 경주대학교에서 경주지역 폐사지 석조문화재를 조사하면서 보고된 바 있다. 하지만 유적주변에 적재된 쓰레기로 인하여 민원이 제기되어 2011년 시민생활국 청소과에서 주변을 정비하면서
철책을 설치하였다.
시
본 사지는 경주의 동남쪽의 천군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유적의 주변에 안내판이나 상황판등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찾아가기 쉽지 않다. 또한 석탑재 주변에 쓰레기처리 문제로 민원이 발생하여 경주시에서 철책을 둘렀으나, 여전히 탑재들은 방치되어 있다. 현재 사지 내에는 석탑재 8매가 남아있는데, 옥개석 1매, 탑신석 1매, 지대석 3매, 기단갑석 1매, 기단면석 2매이다
1층 탑신석은 108㎝×108㎝×110.5㎝(가로×세로×높이)의 크기로 상면의 가운데에는 직경 20.0㎝, 깊이 15.5㎝의 원형의 사리공이 있다.
탑신석의 양 우주 사이에 면석에는 사천왕상이 부조로 새겨져있으나, 이끼와 등으로 인하여 부식과 마멸이 심하게 남아있다. 사천왕상은 전부 머리에 투구와 갑옷을 착의한 무장상이다.
왼손에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은 둥근 두광에 발아래에 구름을 표현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에는 지물의 정형성이 없으나, 북방의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왼손에 검을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은 박락
이 심하다.
서방 광목천과 남방증장천은 어떤 지물을 들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모와 박락이 심한 상태이다
지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현재 일부만 잔존하였다.
기단갑석은 일부만 잔존하며,
상면에는 2단의 탑신받침이 확인된다.
1층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5단으로 상면에는 1단의 탑신받침이 확인되며 전각에는 풍탁공이 뚫려있다. 탑재주변에는 기와편, 토기편, 자기편 등이 확인된다
본 유적은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석탑재로 알려진 이후 이곳에 있었던, 탑재가 훼손되거나 분실되는 등의 수난을 겪으며 지금
에 이르고 있다.
본 사지의 탑신석에는 사천왕상이 얕은 부조로 새겨졌으며, 투구와 갑옷을 입은 무신상으로 발 아래에는 악귀를 대신하여 구름을 밟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이 새겨진 9세기의 석탑을 이해 할 수 있는 한정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충분한 학술적인 연구의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현재 사역은 도난이 용이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적의 훼손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따라서 사역의 범위와 유적의 존속시기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를 비롯한 복원정비가 필요한 유적이다.
출처 경주 지역 폐사지 기초조사 연구





